산 밑엔 산수유 백록담엔 상고대/두 계절의 짜릿한 동거
중국의 국경은 북쪽으로 헤이룽장(黑龍江)성과 남단으로 하이난(海南)섬까지 5,500km에 이른다. 위도의 범위가 15도~70도에 이르니 한나라 안에서 사계절이 공존한다. 유럽의 큰 나라에서도 스키복과 비키니를 한 시즌에 볼 수 있다.
한나라 다(多)계절. 우리나라는 어떨까. 지금쯤 제주도에서도 두 계절을 한 공간에서 체험할 수 있다. 물론, 겨울과 봄 문턱의 간극에서지만. 지금 제주도는 봄 채비가 한창이다. 훈기 를 들이마신 종려나무는 새순을 밀어내고 들녘 유채꽃은 노란 화낭(花囊)을 한껏 부풀렸다. 고도를 높인 한라산에서는 겨울의 잔영과 만날 수 있다. 중턱 상고대는 계절을 동결시켰고 백록담의 바람은 화신(花信)을 막아서고 있다. 초원과 설산이, 산수유와 눈꽃이 동거하는 제주로 떠나보자.
제주를 말하면서 추사(秋史)를 빼 놀 수 없다. 추사는 1840년 한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추사의 형벌은 유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하다는 위리안치(圍籬安置). 일종의 가택연금이다. 추사는 꼬박 9년을 제주에 머물렀다.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이 시기에 추사의 예술세계는 한껏 고양되었다. 완숙한 듯 농익은 듯 분방한 추사의 서체가 이 때 완성되었다. 풍류에 머물렀던 그의 시문(詩文)이 형이상학적 세계로 옮아 간 것도 이 시기다.
무엇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한양의 엘리트는 이곳에서 문학의 허영과 필법의 기름기를 빼고 맑은 선비로 거듭날 수 있었다.
170여 년 전 추사는 유배자의 신분으로 제주로 들어왔다. 새벽녘, 제주항에서 내려 제일 먼저 추사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한 세기를 뛰어 넘어 추사와 한 공간에 섰다는 것만으로 그 감동은 크다.
제주항을 나온 버스는 시청 앞을 지나 5·16도로로 곧장 접어든다.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이 도로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를 남북으로 잇는 대동맥이다.
일주도로가 제주를 1일 생활권으로 묶었다면 5·16도로는 한라산에 막혀있던 제주를 횡적으로 연결했던 문화와 산업의 통로였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바로 성판악으로 올라선다. 600고지의 오름줄기인 이 고개는 한라산의 동쪽에서 높이 솟구쳐 구불구불 산길을 펼쳐 놓는다. 오름 외곽의 암벽이 널빤지(板)를 쌓아 놓은 성(城)과 같다고 해서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
성판악 휴게소는 등산객으로 북적인다. 매년 750만 명이 제주를 찾는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에겐 사계절 익숙한 풍경이리라.
인파를 뚫고 침목으로 길을 낸 비탈길을 오른다. 초입부터 겨울 풍경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와 달리 언덕길은 여느 산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길도 나무도 무채색 일색이다.
신록이 자취를 감춘 시기, 산길엔 굴거리나무, 꽝꽝나무가 초록을 펼쳐내고 있었다.
밋밋하게 펼쳐지던 산길은 속밭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눈길을 펼쳐 놓았다. 데크 위엔 무릎 높이의 빙판이 지고 길옆 숲에는 눈꽃이 만발했다. 눈과 함께 악명 높은 한라산 돌풍도 모습을 드러냈다. 춘분 절기를 비웃듯 드센 강풍이 산객들의 체온을 빼앗아 버린다.
복장과 채비를 고산등정 모드로 바꾸고 일행은 바람을 뚫고 나간다. 어느 순간 일행 앞에 거대한 숲길이 펼쳐진다. 아늑하게 펼쳐지는 푸른 기운. 1970년대 산림녹화 사업 때 심었다는 삼나무 숲이었다. 40여년 만에 이런 멋진 숲이 생겨났다니 놀랍기 만하다.
피톤치드 샤워를 하며 잠시 유쾌하게 걷는다. 잠시 후 조그만 갈림 길과 만난다. 사라오름(1,324m) 가는 길이다. 제주도 전체 오름 386곳 중 가장 높은 곳. ‘작은 백록담’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가파른 계단을 10여분 쯤 오른다. 멀리서 눈앞이 밝아지며 하얀 호수의 정경이 펼쳐졌다. 호수는 태고의 신비를 가득 머금은 채 산객들의 발길을 들이고 있었다. 텅 빈 산정(山頂)에 적막한 웅덩이는 바람소리마저 삼켜 버린다. 호수의 시린 적막은 산객들을 상념 속으로 몰아넣고는 못둑 저편으로 훌쩍 떠나 버린다. 호수의 겨울 정경을 렌즈에 담고 다시 등정 길에 오른다.
어느덧 1,400고지다. 갑자기 앞에서 와! 하는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한걸음에 내달리니 눈앞에 상고대 장관이 펼쳐져 있다.
아침 햇살을 흠뻑 머금은 빙화(氷花)의 향연, 등산객들은 ‘투명한 감동’속으로 빠져든다. 가이드는 ‘한라산에 봄눈은 흔하지만 4월 상고대는 진객 중의 진객’이라고 말한다.
진달래대피소에서 일행은 커피로 몸을 녹이고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그사이 바람은 더 세졌다. 추사의 붓끝이 이 모양 이었을까. 길옆 로프에도 날카로운 결빙이 서렸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바람의 저항은 거세진다. 1,800고지쯤에서 등산객들의 상당수가 등정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두 어 번 숨을 고른 후 다시 등정에 나선다. 정상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바람의 방해도 거세다. 스틱에 의지해 한걸음씩 내딛는다.
성판악을 나선지 4시간 만에 산은 겨우 정상을 허락한다. 안개와 돌풍을 뿌리며 백록담 친견을 허락하지 않던 날씨는 어느 순간 바람 속에서 아주 잠시 ‘신비의 못’을 비처 주었다.
한 마리 흰 사슴을 본 듯도 하고 설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선 듯도 했다. 거대한 분화구 사이로 얼음의 균열이 선명했다. 3, 4초 남짓한 짧은 순간이었다.
찰나의 감동, 긴 여운을 뒤로하고 일행은 하산 길을 서두른다. 관음사 쪽 하산 길에 돌풍이 몰아친다. 아무래도 진입은 무리다.
바람이 막아선 길, 자연이 거부하는 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없이 성판악 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고도를 낮추자 풍속도 잦아들었다. 바람이 잦아든 길에 다시 상념이 찾아든다. 길옆 주목의 형해(形骸)에서 세한도의 정한이 느껴진다.
얼마 후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추사는 제한적이지만 활동 반경을 넓혀갈 수 있었다. 가깝게는 대정향교, 안덕(安德)계곡까지 멀게는 한라산, 해안가까지 오르내렸다. 이 과정에서 추사는 한국 회화사 최고의 명작 ‘세한도’(歲寒圖)를 완성했고 불후의 서체로 평가 받는 추사체를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다.
혹자는 세한도의 노송이 한라산의 고사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고 추사체의 거친 획선도 한라산 현무암의 표면이 투영된 것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정치범으로 왔던 추사는 이곳에서 예술적 역량을 원숙하게 다듬었고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랐다.
혹한의 산과 생명을 잉태하는 대지, 지금 제주에는 두 계절이 머물고 있다.
수인(囚人)으로 문인으로 서예가로, 추사가 이곳에서 ‘두 계절’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