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황산트레킹(2011.6.10.3박4일) ●청복산우회--12명 □ 제1일(6. 10. 금) 우리 청복회원 일행 12명이 중국 단동에 위치한 봉황산(鳳凰山) 등반을 위해 동인천 지하철 역 2번 출구 앞에 모인 것은 6월 10일 금요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그리고 택시 3대에 4명씩 분승 이동하여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 1층 수협 앞에 집결한 시각이 오후 3시 30분. 오후 4시 30분경 승선 수속을 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8명이 세관 X-ray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짐 속에 있는 등산용 칼 탓이었다. 모두 배낭에서 칼을 꺼내 선박회사에 영치시킨 다음 출국 수속을 밟고 단동페리호에 승선한 시각은 오후 6시가 되어서였다. 단동(丹東)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단동의 옛 이름은 안동(安東)으로 압록강을 끼고 북한의 신의주(新義州)와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의 숙박은 6인실인 104호와 106호실 두 방을 쓰게 되었다. 2층 침대 3개와 샤워실을 겸한 화장실이 있는 선실이었다. 우리를 단동까지 실어다줄 단동페리호는 15,000톤급으로 최대 승선인원은 720명이었으며, 선내에 면세점과 잡화점, 라운지, 식당 등이 있었다. 면세점에는 담배와 주류 이외의 다른 물품은 전혀 없었는데, 그 가격이 얼마나 저렴한지 국내에서 한 갑에 2,000원 하는 ‘디스’ 담배가 고작 900원, 2,500원의 ‘레종’이 1,025원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인천항을 출발한 후 장산곶 부근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며 저녁을 먹는다고 하는데, 이날은 오후부터 뿌리는 가랑비 때문에 낙조는커녕 담배를 피우기 위해 데크에 나가는 것도 자제해야 될 정도였다. 기껏 애연가는 오창권, 이근영, 유재엽 세 사람뿐이긴 했지만 문선창, 김창묵 군이 가끔 끽연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중국산 압록강표 맥주와 정상표, 박진태 군이 면세점에서 구입한 발렌타이 등 양주로 무료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수다와 고성이 뒤섞인 술자리를 파하고 잠자리에 든 것은 자정을 훌쩍 넘긴 후였다. |  | □ 제2일(6. 11. 토) 봉황산은 단동에서 57km떨어진 봉성 시에 속해 있으며 최고봉인 찬운봉은 해발 836m밖에 되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어 전혀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추락의 위험을 무릅쓴 암릉 등반 코스로 아주 유명한 곳으로 등산에 모두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이곳 산자락에서 숙영할 때 꿈에 봉황 수백 마리가 나타나서 봉황산이라고 이름 했다는데, 우리의 옛 고구려 영토였다는 생각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제부터 사흘간 밟고 다닐 만주 벌판 모두가 우리의 고토였으니까……. 아침에 기상하여 선미 데크에 나가보니 여전히 비가 계속 질금거리고 짙은 해무 탓에 일출 감상은 아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봉황산 등반이 어려울 수도 있어 걱정스러웠다. 조식 후 단동 동항에 도착했는데 외항에서 1시간가량을 지체한 후 하선했지만 입국 수속에 또 1시간 정도 소요되니 은근히 짜증이 난다. 만만디 정신인지 공무원들의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여객을 마냥 기다리게 만든다. 간신히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평양 출신의 현지 가이드 이성일 씨를 만났다. 국적은 중국이라고 했다. 자신은 명랑한 성격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보기에 좀 촐랑거리는 스타일이었고, 자본주의 생리를 너무 약삭빠르게 꿰고 있는 듯했다. 우리 12명 이외에 사진작가 1명과 여행 작가 1명, 천안 지역 산악회 회장 1명과 또 다른 산악회 총무 1명 등이 합류했다. 그들은 주로 다음 해외 등반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왔다는데, 봉황산 사전답사가 그 목적이었다. 천안지역 산악회 회장은 천안의 고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분으로 우리와 개띠 동갑으로 매우 유머가 넘치는 분이었다. 여행 작가는 39살의 여자였는데 버스로 이동하는 나흘 내내 이근영 군이 옆자리에 앉아 수작을 붙였는데, 과연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모두 16명으로 불어났다.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걸려 봉성(鳳城)으로 이동하였다. 봉성은 단동의 외곽도시로서 봉황산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가야 될 곳이다. 동항에서 너무 지체한 탓에 이미 2시가 훨씬 넘어 일행 모두가 시장하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길가 소공원에 버스를 세우고 북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반찬은 더덕무침, 명태식혜, 뱅어무침, 오이, 고추와 고추를 찍어먹을 된장 한 덩어리였다. 그런데 가이드가 젓가락을 빠뜨리고 챙겨오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멀리 있는 슈퍼마켓으로 뛰어가고, 성미가 급한 친구들은 나무 가지를 꺾어 그걸 젓가락 삼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반찬이 조금 입에 짠 듯했지만 제법 입맛에 맞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심을 먹고 산행을 위해 봉황산 매표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경이었으니, 제대로 산행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입장료는 60위안. 주차장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아스콘 포장이 잘 되어 있었고, 일행은 전기차를 타고 20분 정도 걸려 등산로 입구에 다다랐다. 등반 순서는 봉화대(烽火臺), 나한봉(羅漢峰), 장군봉(將軍峰), 토이봉(土耳峰), 노우배(老牛背), 노호구(老虎口)를 거쳐 정상에 이른 다음 임도를 따라 하산하도록 되어 있었다. 등산을 잘못 하는 사람들을 위해 2인용 리프트를 설치, 그걸 타고 토이봉까지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상표, 김창묵, 이범재 군 등 세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리프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편도요금은 미화 5$, 또는 30위안이었다. 하산 후 단동 시내로 이동하여 한식당에서 밥을 먹고 호텔 투숙 및 휴식을 취했다. 호텔은 3성급인 국제 호텔이었는데 시설이 낡긴 했지만 23층짜리 제법 큰 규모의 호텔이었다. 북한 사람들이 자주 묵는 곳이라고 했는데, 실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 사람들과 조우한 친구들도 있었다. □ 제3일(6. 12. 일) 호텔에서 뷔페식의 조식을 끝내고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향했다. 호산장성 역시 옛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에 와서 중국 역사학자들은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우기며 대대적인 선전을 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일환인 듯하다. 산성을 따라 이루어진 트레킹 코스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산성 정상 누각에서는 북한 땅이 빤히 내려다 보였다. 군인 초소, 옥수수밭, 그리고 일하고 있는 여인네 몇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도 모두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되고 있어 숲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산성에서 내려온 후 압록강 너비가 한 발짝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일보로(一步路)를 찾아 북한 땅 방산마을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압록강 이쪽에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시끌벅쩍 하였는데 강 건너 방산마을은 적요 그 자체였다. 멀리 초병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눈에 띌 뿐이었다. 압록강 지류에는 쾌속선이 관광객을 싣고 북한 지역으로 운행하기도 하였다. 다시 단동 시내로 들어와 6.25전쟁 때 미군 B-29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斷橋)를 관람했는데 망원경으로 위화도와 신의주 시가지를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점심은 평양고려식당이라는 북한 식당에서 한식을 먹었다. 종업원은 모두 북한 여성들이었다. 모두 날씬한 몸매의 미인이었지만 첫 인상이 차가워 보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냉수를 가져다 달라고 하자 “냉수 말입네까?” 하고 되묻는 어투가 매우 쌀쌀맞았다. 그렇지만 점심 식사가 끝날 무렵 무대의상을 입고 춤을 추며 노래를 할 때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었지만 가식적인 표정에 불과했다. 노래는 ‘아리랑’으로 시작해서 ‘선창’, ‘목포의 눈물’을 거쳐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으로 끝났다. 노래와 기타, 키보드, 드럼 등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런데 이들이 ‘선창’과 ‘목포의 눈물’을 부른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선창’의 작사가 조명암(본명 조영출)은 시인으로서 ‘목포는 항구다’, ‘알뜰한 당신’, ‘신라의 달밤’ 등 수많은 우리 가요들의 가사를 지었는데, 해방 후 월북했고, ‘목포의 눈물’(작사 문일석 · 행방불명)은 가사가 지닌 외세 배격(여기에서는 일제)이라는 의미에서 이 두 노래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젠 단동 관광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차례다. 승선 전에 잡화 및 농산물 판매점에 들러 간단한 쇼핑을 했는데, 일행 대다수가 깨와 잣을 사서 배낭 속에 넣는 것을 보고는 대단한 애처가(?)라는 혼자생각을 했다. 오후 2시 30분에 단동 동항 국제여객 터미널 도착 후 승선 수속을 밟기 시작했는데, 승선 수속 역시 한 시간씩 지연되었다. 선상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유시간을 가졌는데,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양주와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김창묵 군이 회령 출신의 탈북자 여인을 우연히 사귀게 되어 일행의 부러움을 샀다. 중국에 있는 친정에 다녀온다는 그 여인은 1975년에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 다음 중국과 미얀마를 거쳐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서부터미널 근처에서 스낵코너를 하고 있다고 했다.   ■“ 제4일(6. 13. 월) 선상 일출 역시 짙은 해무로 볼 수 없었다. 하선 직전에 김창묵 군이 사귄 회령 출신 에미나이가 살구, 망고, 소시지, 닭발 등을 들고 106호 선실로 방문하였다. 모두 과일과 소시지를 나누어 먹으며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주로 북한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김창묵 군과 연락처를 서로 주고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다른 이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마침내 오전 9시에 인천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모두 피곤한 모습이었다. 출발 당시 영치시켰던 등산용 칼을 되찾은 다음 택시로 동인천 지하철역으로 이동하였다. 일행 모두가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다음 해외등반을 기약하면서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남용희 등반대장을 비롯 김창묵, 문선창, 박진태, 오창권, 유재엽, 이근영, 이범재, 이창헌, 임태빈, 정상표, 진용찬 등 열두 명의 청복회원 여러분들, 참으로 고생 많았다. |